집안에 그윽한 향이 짙게 퍼졌다. 오후 6시 언저리였다. 거실 한 쪽에 모셔진 반가사유상 앞에 향공양이 올려졌다. 하얗게 쇤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빗어 넘긴 중년 남성이 신발을 벗고 외투를 벗은 후 거실에 오르자 향을 살랐다. 합장 반배를 했다. 익숙해 보였다. 퇴근 후 으레 먼저 하는 일. 저녁상을 차리는 아내도 향냄새에 남편임을 알았다. 오래됐다는 증거다.
나무아미타불 여섯 글자를 한자로 사불,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의 우울증을 털어낸 전춘택(51, 심인心印) 씨 가정의 저녁 풍경이다. 그는 동산불교대학 30기 졸업생이다. 지난해 2월 사불 10만 8000번을 회향한 이들에게만 주어지는 특권, 아미타패도 받았다. 졸업식 당시 입학 때와 졸업 때 얼굴이 달라졌단 도반들의 말이 떠올라 그의 속사정이 궁금했다. 그를 자택에서 만났다.
“이제 사불은 하지 않지만 아침저녁으로 향을 사르며 부처님을 닮고자 하는 마음을 다시 새기지요. 별다른 건 없어요. 그것 뿐 이에요.” 아무 일도 아닌 냥 말을 건넸지만 그의 가지런한 웃음 뒤에는 마음 속 깊이 자리한 불연이 숨 쉬고 있었다. 사람들은 대부분 맑은 영혼을 갈망한다. 그 역시 그랬다. 중, 고등학교 시절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사람들이 뿌리고 간 전단지를 줄곧 읽었더랬다. 그러나 기독교의 교리란 온통 의문 투성이었다. 무엇보다 마음에 와 닿지 않았다.
전쟁 상흔에 우울증 시달려
육군사관학교에 입학, 스스로 법당으로 향했다. 그 무렵에도 그는 마음의 평화를 찾은 부처에 대한 궁금증을 놓지 않았다. 석가모니의 출가 전후 이야기가 담긴 『불교성전』을 구해 읽었다. 성철 스님이 감수한 그 책은 세로로 읽어야했다. 허나 불편함도 문제되지 않았다. 하나 둘 밑줄과 동그라미 표시가 늘어 갔다.
“모든 것이 명쾌했어요. 부처님의 깨달음 전과 후의 일들이 논리 정연했지요. 차츰 깨달음이라는 것이 새벽 미명이 밝아오듯 천천히 오거나 어느 순간 단박에 올 수도 있구나 싶었습니다.”
툭. 책에서 성철 스님의 법명이 적힌 그림 한 장이 나왔다. 그도 놀란 눈치였다. 잊고 지낸 터였다. 한 번의 붓놀림으로 그린 ‘○’. 그는 잠시 감회에 젖었다. 육사 1학년 여름이었다. 2주간의 휴가가 주어졌다. 합천 해인사 여름수련회에 따라 나섰다. 당시 백련암에는 가야산 호랑이 성철 스님이 주석하고 있을 때였다. 3000배에 도전했다. 처음 하는 3000배는 1080배로 끝났다. 결국 대표 한 명이 올라가 성철 스님에게 꾸지람을 들었다. 그 때 스님은 그림을 그려 대표를 내려 보냈고, 그렇게 그림 한 점을 얻은 것이다.
문득 인연을 거슬러 올라가던 그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깊이 묻어 둔 과거가 기어 나왔다. 2003년 미국의 선전포고로 시작된 이라크 전쟁. 그는 전쟁의 한 복판에 내던져졌다. 2004년 1월말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로 파견됐다. 티그리스 강변에는 학살당한 듯한 시체들이 발견됐다. 사태는 급속도로 냉각됐다. 바그다드로 물품이 들어오던 육로가 폐쇄됐다. 군용 항공을 이용하면 어김없이 지상에서 이라크 저항세력의 총알세례를 받았다. 옆 승객이 총상으로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봐야만 했다.
고 김선일 씨가 이라크 저항세력 ‘일신교와 지하드’에 납치돼 변사체로 발견된 사건 직후부터 그의 하루하루는 지옥 같았다. 그는 김선일 씨의 도막난 시체를 수습했다. 이후로도 미군의 오발과 이라크 저항세력의 테러로 인해 이름 모를 이들의 살점과 뼈를 수습했다. 납치는 흔한 일이었고 누군가는 그렇게 생을 마감했다. 처참한 장면들은 많은 밤 그를 괴롭혔다.
전장에 파견, 그의 군대 생활 이력에 있어 자부심과 명예는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아니, 사라지고 고통과 향수만 남았다. 마음이 아플 때는 부와 명예도 슬픈 위안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국내에 보고서를 쓰고 난 뒤 밤잠을 제대로 못잔 경우가 허다했다. 밤이 되면 황량한 바그다드 위로 쏟아지는 별들의 수를 헤아리기도 했다. 한없이 많은 별은 그를 기다리는 고통들 같았다. 머리에 강한 전기 자극이 오면 한 동안 의자에 앉아 꼼짝을 못했다. 머리맡엔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수류탄과 권총을 놓고 잤다.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역사라는 일람표 위에 휘갈긴 낙서처럼, 그렇게 사라질 수도 있었다. 하루하루가 생지옥이었다. 죽음의 그림자가 거머리처럼 달라붙었다. 보고를 위해 바그다드 일대를 돌아다닐 땐 죽음의 그림자만 밟혔다.
“석굴암을 작게 만든 불상을 모시고 염주를 돌리며 기도했습니다. 천수경을 외우고 나서야 비로소 잠이 들 수 있었지요. 바그다드 시내를 나갈 때 옆에 오는 차가 터질지도 모를 상황이었으니까요.”
상흔의 굴레는 단단했다. 2005년, 그리던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전쟁이 가져다 준 상흔들은 미처 두고 오지 못했다. 평소 자상한 아버지였던 그의 예민해진 신경은 가족들이 먼저 알았다. 맑은 영혼에의 갈망. 가장 어두운 때가 해뜨기 바로 직전이라 했던가. 국방일보에 실렸던 동산불교대학 광고를 보고 그 길로 등록했다. 중요한 약속이 아니면 수업에 빠지지 않았고 약속도 미루며 다녔다.
그리고 나무아미타불 사불 10만 8000번을 시작했다. 향을 사르고 108배를 한 뒤 한 자 한 자 정성스럽게 써내려갔다. 일부러 한자로 썼다. 더디고 손가락 마디마디가 아팠다. 그러나 그 시간만큼은 오롯이 가족들의 안녕과 탁해진 영혼에 대한 참회의 시간이었다.
나무아미타불을 10만 8000번 쓰면서 끊임없이 ‘나는 누구인가’를 묻고 또 물으며 내면의 삼독심을 발견했다. 염불 테이프를 틀어 놓고 순간순간 마음을 정화했다. 점차 얼굴에 미소가 돌아왔다. 같이 불교를 공부하던 도반들도 마음자리가 밝아진 그를 보고 신기해했다. 그의 정성은 연합포교사 고시 합격이라는 덤도 가져왔다. 놀라운 발견이었으리라. 마음자세를 바꿈으로써 삶을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니.
수행으로 일상의 웃음 되찾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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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부처님에 공양한 사불. |
“한자로 한 자 한 자 쓰고 나면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온갖 번뇌가 사라졌습니다. 처음엔 쉽게 생각했는데 하루 1장도 쉽지 않더군요. 그래도 저 때문에 힘들었을 가족들에게 참회하는 심정으로 썼습니다.”
그의 변화와 부처님을 향한 그의 마음은 아내가 거들었다.
“가장이 향 피우고 108배를 하는 집이 얼마나 될까요. 전엔 매일 했어요. 요즘엔 쉬는 날 주로 하지만. 어린 나이에 시집 와 큰 애를 가졌을 때 남편은 법당에 새벽 기도를 다녔어요. 그 불심이 큰 딸로 이어진 것 같아요. 얘가 불심이 깊어요. 외국에서 혼자 공부하면서 가피를 많이 느낀다고 하네요. 가족들도 탈 없이 지내는 것도 남편 덕이랍니다.”
향이 꺼졌다. 그가 다시 향을 살랐다. 은은히 향기가 퍼졌다. 길가에 핀 꽃은 누가 향기를 맡아 주지 않아도 그 향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러나 향기는 널리 퍼지게 마련이고 누군가는 잠시 걸음을 멈춰 향기를 가슴 깊이 들여 마신다. 그가 나무아미타불 사불로 되찾은 영혼의 향기는 이미 집안 곳곳에 그윽하게 배어 있었다.
법보신문에서 104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