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님이 날 기르실 제 여덟 섬 너 말의 젖을 먹이시고, 젖은 자리 어머님이 누우시고 마른자리 자식 뉘어 키우시고 튼실하게 잘 자랐다는 말 한마디에 온갖 고통 잊으셨네. 청년 되어 집 떠난 자식을 생각하며 천 줄기 만 줄기 눈물 흘리시며, 어미 마음은 자식 따라 다니시네….”
오늘도 나는 『부모은중경』을 독경한 후 어머니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며 마음을 모아 부처님께 절을 올린다. 어머니는 내가 결혼해 첫 아이가 여섯 살이 될 때 돌아가셨다. 유독 어머니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터라 어머님이 항상 그리웠다. 나도 자식을 낳아 키우기에 첫째 딸을 보면서 어머니 생각에 한 없이 울었다. 그야말로 고장 난 수도꼭지였다. 49제를 치르는 동안 어머니가 좋은 곳으로 가시길 바라는 마음에 절을 시작했다.
당시 절은 어머니와 나를 이어주는 매개체와도 같은 존재였다. 때문에 시간이 허락하는 데로 바닥에 몸을 숙였다. 불교의 교리나 수행의 의미도 알지 못한 채 내가 지금 하는 행위가 스스로를 낮추고, 비워내는 것인지도 모르면서 말이다. 그렇게 절을 시작하면서 경기도 안산 화림선원에서 13년 동안 새벽예불과 사시예불에 참석해 나만의 시간을 가졌다. 이후 경기도 분당으로 이사를 와서는 지장선원에서 9년간 정진을 이어갔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몇 배를 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절을 할 때 입는 바지가 수 십 벌은 닳아 없어졌다.
어머니에 의해 인연 맺어진 불교는 자연스럽게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고, 3년 전부터 동산불교대학에 입학해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했다. 2년 과정의 정규반 대학을 졸업하고 포교사 과정을 수료했으며, 현재 3년 과정의 대학원에 재학 중이다. 또 한문학과, 의식학과, 범패학과, 사물학과도 열심히 수강하고 있다.
돌이켜보면 내가 불교에 열중할 수 있었던 것은 가족의 이해가 있었기 때문이다. 법을 따르고자 하는 나의 열정을 말리기에는 내가 너무 안쓰러워 보였던 것 같다. 어머니가 나를 사랑하듯 온 가족이 부처님 마음으로 내가 공부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절 밑에 방하나 얻어 스님이 되라고 호통 치던 남편도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지해 마음을 잡아가는 내 모습을 보면서 이제는 가장 든든한 후원자가 됐다.
어머니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처럼 우리도 주변을 살핀다면 사랑하지 못할 사람이 어디 있을까. 탐냄, 성냄, 들뜸, 나태, 시기, 질투의 다섯 가지 악재가 사라지도록 피나는 노력과 정진을 게을리 하지 않겠다. 어머니의 인연으로 부처님을 만나게 됐고, 수행을 시작했으며, 불법을 배워가는 지금이 너무도 행복하다. 불교를 공부하고 그 의미를 배우면서 무엇보다 계율을 지키도록 노력하고 있다. 팔만사천 법을 모두 외운들 실천함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어머니가 불법과 인연을 맺도록 하신 것도 아마 이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인 듯싶다.
나를 맑힘으로 주변을 맑힌다는 것, 자등명 법등명의 부처님 말씀을 잘 깨닫고 제가불자로서 스스로를 이롭게 하고 다른 사람도 이로운 자리이타를 실천하며 남은 삶을 부처님 법 안에서, 법을 지키며 살도록 정진할 것이다. 또 위타인설(爲他人說)하고 더 넓고 크게 광위인설(廣爲人說) 할 것이다. 이것이 부처님의 뜻이고, 모두가 행복한 불국토를 만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연화선·64)
1068호 [2010년 10월 20일 10: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