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산반야회·동산불교대학 이종현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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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5-01-21 16:26 조회1,791회 댓글0건본문
1. 동산반야회·동산불교대학 이종현 이사장 .....금강신문에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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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의 못다 핀 佛心 세상 향한 ‘아미타불’ 염불로 달래
사람에게는 저마다의 향기가 있다. 음식에서 나는 냄새처럼 코로 맡을 수 있는 향기가 아니라 삶의 연륜이 몸에 스며들어 행동과 말투 하나하나에 드러나는 향기다. ‘향을 싼 종이에는 향냄새가 나고, 생선 묶은 새끼에는 비린내가 난다’는 〈법구경〉의 말씀처럼 부처님의 품안에서 법답게 살아온 사람은 부처의 성품이 얼굴에, 보살의 성품이 행동에 나타난다. 수십 년 불교를 신행하고도 삶에 찌든 얼굴을 하고, 세속적 욕망에서 비롯된 행동을 일삼고 있다면 그는 어떤 공부가, 어떤 수행이 부족했는지 살펴봐야 한다. 무늬만 불자에서 법사로 구랍 13일 동산반야회·동산불교대학 새 이사장이 바뀌었다. 제3대 이상우 이사장으로부터 바통을 넘겨받은 이는 이종현(59) 이사장. 취임 한 달이 되던 지난 13일 동산불교회관에서 이종현 이사장을 만났다. 그는 경기도 광주에서 건설업체를 운영하고 있는 기업가다. 동산반야회·동산불교대학 이사장을 맡기 전까지 불교계에 알려져 있던 인물은 아니었다. 어린 시절 이종현은 무늬뿐인 불자였다. 쌀 한 자루 머리에 인 모친의 손을 잡고 사찰을 따라갔던 게 불교와의 인연의 전부였다. 하지만 평생의 배필로 만난 아내는 조계사청년회를 다녔을 정도로 신심이 돈독했다. “장모님이 신심 돈독한 불자였어요. 초하루, 보름, 지장재일과 관음재일 등 사찰 법회는 빼놓지 않고 참석하셨죠. 장모님의 영향을 받은 아내와의 인연으로 인해 부처님께 한 발짝 더 다가가게 됐던 것 같아요.” 부부의 불심이 돈독하면 그 사이에서 태어나는 아들과 딸도 영향을 받기 마련. 특히 아들은 청소년기를 거치며 〈금강경〉에 빠져들었다. 수원공고를 다닐 때는 등하교 때마다 수원 용화사에서 받은 파란색의 〈금강경〉을 끼고 다녔다. 경기도 광주에서 학교까지는 왕복 두 시간이 소요됐는데, 귀로는 〈금강경〉테이프를 듣고, 눈으로는 경전을 독송했다. “테이프를 중간쯤 들어도 경전 어디쯤인지를 금방 찾을 정도로 열심히 외웠어요. 어릴 때도 특이한 모습을 자주 보여줬던 걸로 기억 되요. 유독 ‘이게 뭐야?’라고 질문을 하면서 사물에 대한 강한 호기심을 드러냈는데 조금 커서는 현관에 있는 신발을 항상 가지런히 정리했어요. 가족들의 신발까지도요.” 〈금강경〉 독송을 즐기던 아들에게 영향을 받은 것일까? 2002년 아들이 고3이 될 무렵, 불교에 대한 궁금증이 강하게 일었다. ‘불교에는 많은 경전이 있는데 그 내용은 도대체 무엇일까?’ 능인선원을 찾아가 3개월 간 기초교리과정을 배웠다. 이후 지인의 소개로 동산불교대학을 알게 됐다. 경전 공부를 위해 한문공부의 필요성을 느꼈던 그는 동산불교대학 불교한문학과에 입학했다. 주 3회 경기도 광주에서 종로까지 왕복 4시간을 버스로 오갔다. 아들 잃은 상심, 아미타사로 달래 늦게 불붙은 불심은 시간이 흐를수록 커져만 갔다. 2년 과정의 불교대학을 마친 후 3년 과정의 동산불교대학원 법사과정까지 마쳤다. 동산반야회 신도회장과 수석이사도 맡았다. 동국대학교 불교경영자 최고위과정도 수료했다. 한마디로 불교에 푹 빠졌다. 하지만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불심 돈독했던 아들은 2007년 12월, 친구들과 가평 인근으로 여행을 떠났다가 영영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빙판길에 차가 전복되는 사고였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던, 세상에 하나뿐인 아들을 먼저 보낸 부모의 가슴은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졌다. “그 아픔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겠어요.” 가볍게 미소 짓는 얼굴에 슬픔이 묻어났다. 눈가도 촉촉해졌다. “불교를 미리 만나지 않았다면 생살을 도려내는 것보다 더 큰 아픔을 견뎌낼 수 없었을 겁니다.” 집에서 10여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야산을 매입했었는데, 당시에는 그곳에 아들의 무덤을 만들게 될 지 상상도 못했다. 부부는 날마다 무덤을 찾았다. 장성한 아들을 한순간에 떠나보낸 부모가 어떻게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할 수 있을까? 아들을 잃은 아픔은 가슴에 하나의 화두로 새겨졌다. 때마침 동산반야회 김재일 회장이 아미타사를 짓고자 발원을 했다. 아들을 먼저 떠나보낸 후 아들에 대한 추억을 하나둘 떠올리며 ‘어쩌면 아들은 전생에 불교와 깊은 인연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아들을 위해 무언가를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전국염불만일회에 가입해 ‘아미타불’ 염불을 할 때예요. 내가 아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미타불’ 염불을 들려주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아들이 묻힌 야산 3만평을 동산반야회에 기증하게 됐죠.” 하지만 이 불사는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했다. 김재일 회장이 세연(世緣)을 다했기 때문이다. 동산반야회를 26년간을 이끌어온 김재일 회장은 아미타사 건립의 토대가 마련된 지 6개월 만인 2008년 6월 18일 세상을 떠났다. 기업이든, 단체든 한사람의 원력으로 우뚝 섰을 경우, 그 빈자리는 너무나 크다. 김재일 회장이 없는 동산반야회도 동력을 상실한 듯 힘을 잃었다. 다행히 김재일 회장은 함께 동산반야회를 이끌어온 안동일 변호사에게 동산반야회와 불교대학 이사장직을 부탁했다. 회원들과 동산불교대학 동문들이 주인공이 돼 잘 이끌어 달라는 당부였다. 2대 안동일 이사장이 동산의 운영체계를 확고히 세웠다면 3대 이상우 이사장은 업무의 체계화로 효율성을 높였다. 이러한 노력 덕에 2009년 10월 경기도 광주에 동산연수원(아미타사)을 개원할 수 있었다. 동산 재도약 밑거름 되고 파 불교계에 1970~80년대는 암흑기다. 조계종의 경우, 분규가 극에 달해 다툼이 끊이지 않았다. 신군부가 10.27법난을 자행하며, 사찰을 군홧발로 짓밟은 원인의 일부를 불교계 스스로도 제공한 셈이다. 동산반야회는 이런 시기에 태동했다. 동산반야회는 1982년 ‘청년 불교가 살아야 한국불교가 살고, 한국불교가 살아야 사회의 민주화와 국가 발전도 가능하다’는 신념 아래 무진장 스님을 법주로 모시고 출범했다. 이후 교리강좌와 동산선원을 통해 기반을 닦은 후 1992년 동산불교대학을 설립했다. 2년 뒤에는 한국불교기아도움기구를 발족했으며, 1997년에는 조계종 포교사를 배출하기에 이른다. 1998년 여름에는 강원도 건봉사에서 800여 불자들이 모여 전국염불만일회 결사대회를 개최했다. 아미타 부처님을 만일 동안 염불하는 이 결사는 총 27년 5개월이 소요되는 대장정.(회향은 2025년 12월) 지난 6일에는 250여 불자들이 모여 6000일 회향을 했다. “김재일 회장님은 생각과 행동에 걸림이 없는 분이었어요. 불교를 위해 보다 많은 일을 하지 못하고 가신 게 안타깝습니다. 세연을 다한 지 7년이 되는데 활동성과를 정리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습니다. 자료를 정리하다보면 우리가 지속적으로 전개해나갈 만한 사업들이 구분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종현 이사장은 이와 함께 초대 법주를 지낸 무진장 스님의 법문을 정리하는 일도 병행할 계획이다. 입적하신지 1년이 훨씬 넘은 무진장 스님은 생전에 동산반야회에 열정을 쏟았고, 동산불교대학에서 많은 법문을 한 바 있다. 그는 김재일 회장의 업적 정리와 무진장 스님의 법문집 발간이 동산반야회 가족을 결집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동산반야회의 가장 큰 자산은 인적자원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동안 관리를 잘하지 못했어요. 이 분들이 결집을 하면 무언가 이뤄질 것 같은데, 그 계기를 마련하는 게 과제죠. 사무처 직원들이 초창기 멤버들인데 이들과 함께 △염불스테이 △1인 1도반 추천운동 △청년불자클럽 육성 △염불만일회 100일 단위 정기모임 실시 등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이종현 이사장은 동산연수원에 법당을 지은 후 초기 3~4년간은 새벽마다 가서 예불을 모셨다. 요즘은 게을러져 새벽에 못가고 사시나 저녁예불로 대신할 때도 있단다. 자비행도 적극적이다. 2006년경 아는 단체가 사회봉사활동을 한다는 얘기를 듣고 솔깃했다. 망설이지 않고 직원들과 함께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매월 1·2주 화요일, 점심시간 앞뒤로 한 시간씩을 보태 회사 인근 복지관에서 식사배식을 하고 있다. 외부출입을 못하는 분들을 위해 반찬배달서비스도 하는데 벌써 10년째다. 초기에는 탐탁잖게 생각하는 직원들이 많았지만, 요즘은 직원들이 더 적극적이다. “동산반야회의 도약을 위해서는 시간이 좀 더 필요할 것 같습니다. 김재일 회장님 생전에는 사회적인 활동도 왕성하게 펼쳤는데, 지금은 중단된 상태입니다. 이 부분도 아쉬워요. 3년의 임기를 마칠 때쯤에는 동문들의 결집된 모습을 볼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다음 대 집행부를 위해 기반을 탄탄하게 닦아놓고 싶습니다.” ‘동산’을 짊어진 이종현 이사장의 어깨가 무겁다. 하지만 아들의 못다 핀 불심을 떠올리면 힘이 솟는다. 그는 오늘도 동산의 가족들과 함께 날마다 외는 ‘아미타불’ 염불소리가 세상을 밝히는 등불이 되길 기원하며, 먼저 떠난 아들을 향한 그리움을 달랜다. < 금강신문>에서 발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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