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의 강좌/중국불교사 (붓다동산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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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09-05-26 22:00 조회7,412회 댓글0건본문
5월의 강좌/중국불교사 (붓다동산 5월호) - 차차석 교수불경의 번역과 전파
1.불전의 번역
불전 또는 불교성전이란 경 율 논 삼장을 총칭하는 말로서 통칭 대장경이라고도 한다. 경장이란 석존의 교설을 문자화한 것이며, 율장이란 출가자와 재가신도들이 지켜야 할 계율, 또는 출가자의 집단인 승가 내의 생활규범 등을 적은 책이고, 논장이란 후세의 불교학자가 경과 율을 대상으로 하여 그 속에 담겨져 있는 뜻을 풀이했거나 조직, 정리한 연구서 가운데 경 · 율에 못지않게 그 내용이 출중한 논서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45년간에 걸친 석존의 설법을 그대로 문자화해 놓은 경 율은 말할 것도 없고 인도의 불교학자들이 저술한 논서도 그 분량이 적지 않다.
하지만 그 많은 불전이 일시에 중국 땅으로 들어온 것은 아니기 때문에 역경의 기간은 장기화될 수밖에 없었다. 또한 단편적으로 특정 경전이 중국의 어느 지방에 들어왔다고 하더라도, 교통이 불편하고 정보교환의 수단이 발달하지 못했던 당시로서 다른 지방에서는 그런 사실을 알 수도 없었다. 인쇄술의 미비함 또한 번역된 경전의 유포를 더디게 하였기에 불전의 전래와 번역은 자연히 장기간에 걸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기에 중국불교사를 번역의 역사라고 할 만큼 불전의 한역은 큰 의미를 갖는 것이다.
중국에서 불전 전래와 번역은 후한(後漢) 환제(桓帝)의 건화2년(148)에 안식국에서 온 안세고가 단초를 연 이래, 송(宋)의 신종(神宗) 원풍 원년(1078)에 이르기까지 수백 명의 번역자가 방대한 양에 달하는 불교 전적들을 번역하게 된다. 그런데 이들 역자의 대부분은 인도 또한 서역지방에서 도래한 고승들이었으며, 일부만이 인도에 구법, 유학한 중국의 고승들이었다.
번역은 대부분 공동작업 혹은 국가적 사업으로 시행되었다. 역경사업이 본격화되자 역경원이나 번역원이라는 기관을 설치하였는데, 여기에는 역주, 필수, 도어, 증범본, 윤문, 증의 범패(의식담당자), 교감(교열), 감호(마지막 검열자) 등의 직제를 두어 체계적으로 시행하였다. 모든 번역이 이러한 제도 아래 이루어진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여기에 준하여 번역을 하였으므로 어느 정도 경전 번역의 확실성을 보장할 수 있었다.
불경의 전래가 시작되자 경전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경전목록이 필요하게 되었다. 첫 경전목록은 동진(東晋)때 도안(道安)이 처음으로 만든『종리중경목록』(또는 道安目錄)이다. 그동안 번역된 경전들이 역자나 연도 등을 기록하지 않았기에, 언제 누구에 의해서 번역된 것인지를 알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범본을 번역한 것인지, 아니면 중국에서 새롭게 만들어진 것인지조차 알 수 없었기에 이를 바로잡고자 만든 목록이었다.
2) 대표적 역경가
중국불교에 있어서 번역에 종사한 사람은 수백 명을 헤아린다. 이들은 역경에 종사했다 하더라도 역경만 한 것은 아니고, 후진양성과 교학연구, 불교홍포를 겸해서 실천했다. 그들 중에서 대표적인 역경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안세고와 지루가참은 후한 환제 때 중국에 들어왔다. 안세고의 자는 세고이며, 안식국의 태자로 태어났지만 왕위를 숙부에게 양위하고 출가하여 아비담학과 선경에 정통하였다. 후한 환제 건화 원년(147) 낙양에 도착하여 영제의 건녕 연간(168~171)에 이르는 20여년간 오로지 경전의 번역에 종사하였으니, 중국에 불교가 전래된 이래 경전의 번역은 그로부터 시작되었다. 그가 번역한 경전은 대단히 많으나『안반수의경』『음지입경』『사제경』『전법륜경』『팔정도경』『아비담오법경』『아비담98결경』등이 있다. 이들 중에서『안반수의경』과『음지입경』이 중국선종사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
지루가참은 대월지 출신으로서 한나라 환제 말기에 낙양에 들어왔다. 안세고보다 조금늦게 중국에 들어온 그는 영제의 광화(178~183), 중평(184~189) 연간에『도행반야경』『반주삼매경』『수능엄경』『아축불국경』등의 대승경전을 역출하였다. 이 중에서『도행반야경』과『수능엄경』『반주삼매경』은 중국불교 발전에 만흥ㄴ 여향을 미치게 된다. 이들 두 사람의 경전 번역은 곧 안식계불교와 월지계불교의 전래를 말하며, 각각 대 ·소승의 경전을 번역하여 후세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위진시기에 들어와서도 중국에 들어온 역경승들은 지속적으로 불경을 번역한다. 한편 후한 말기의 전쟁으로 낙양과 장안의 주민들이 대다수 남쪽으로 이주한 결과 승려들도 강남지방으로 이주하게 된다. 강남지방은 남해교통의 발달로 인해 뱃길로 불교가 전파되었다. 오나라 수도 건업은 화북지방에서 남하한 불교와 교주와 광주에서 북상한 불교에 의해 불교문화를 꽃피웠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역경승은 지겸과 강승회이다.
지겸스님은 원래 대월지국 사람이다. 조부인 법도(法度)가 한나라 영무제 때 수백 명의 월지인을 거느리고 귀화하였다. 말하자면 낙양에서 태어난 천축인 2세인 셈이다. 지루가참의 제자인 지량(支亮)에게 배웠는데 재주가 매우 비범하여 세상의 칭송을 받았다. 헌제(190~220) 말년에 한나라 왕실의 다툼과 소란으로 말미암아 동향인 수백 인을 거느리고 오나라로 피신하였다. 오나라 임금인 손권은 그의 박학과 재능에 감탄하여 궁중으로 초청하여 동궁(왕세자)인 손량을 보필하고 지도하게 하였다. 이후 손량이 황제에 즉위하자 궁애산으로 들어가 은일하며, 지계(持戒)에 전념하면서 출가자 이외에는 만나지 않다가 60세를 일기로 세연을 마쳤다. 오나라에서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였기에 오지겸이라 칭하기도 했다.
6개 국어에 능통하여 222년부터 253년 사이에 수많은 경전들을 번역하고 주석했다. 지겸이 번역한 경전 중에서 중요한 것으로는『유마힐경』『대명도무극경』『대아미타경』『서응본기경』등이 있다. 이 중에서『유마힐경』과『도행반야경』의 이역본인『대명도무극경』은 특히 노장사상의 사상적 외연을 확장하는 데 막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또한『대아미타경』을 번역하여 중국인들에게 처음으로 아미타부처님의 존재를 알렸으며, 이에 더하여『요본생사경주』를 찬술했다. 그의 주석에 대해 전진시대의 석도안은『요본생사경』 서문에서 “그의 주석은 근원을 잘 헤아리고 있으며, 의심을 잘 해결해주지만 어리석은 사람들은 알기가 쉽지 않다. 나는 그의 주석을 근거로 삼으면서 알기 어려운 곳을 풀이했다.”고 고백하고 있다. 당대를 대표하던 도안이 지겸의 주석이 매우 훌륭했음을 입증했던 것이다.
강승희의 선조는 강거인이며, 대대로 천축(인도)에 왕래하였다. 그의 부친은 상업에 종사하였기에 교지(交趾: 지금의 베트남)로 이주하였다. 10여 세에 양친을 여의고 출가하여 불교와 중국 고전에 능통하였으며, 불교를 전법하고자 하는 의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오나라의 손권이 지배하던 강남의 서쪽지방은 아직 불교가 전해지기 전이었는데, 그는 247년 건업에 들어와 작은 절을 세우고 불상을 안치한 후 불도를 행하고 있었다. 당시 오나라 사람들은 처음 보는 사문을 기이하게 생각하였다. 이후 손권의 요청으로 부처님의 사리를 구하여 왔으므로 손권은 강남에 사찰을 세우고, 처음 세운 절이란 의미에서 건초사라 이름했다. 또한 그 지방을 불타리라 명명했다. 그는『아난염미경』『경면왕경』『찰미왕경』『범황왕경』『육도집경』등을 번역했으며,『안반수의경』『법경경』『도수경』의 3경에 주석과 서문을 지었다.
서진시대의 대표적인 역경승은 축법호였다. 그의 선조는 월지국사람이었으며, 성은 지(支)씨이다. 중국에 들어와 대대로 돈황에 살고 있었다. 8세에 출가하여 외국인 승려인 축고좌에게 사사하였기 때문에 성을 축으로 바꾸었다. 방등경전이 서역에 있다는 말을 듣고, 서역을 순역하며 많은 범본을 구하여 돈황을 통해 장안에 들어왔다. 그 후 무제의 태시 원년(265)부터 회재의 영가 2년(308)에 이르는 40여 년간을 경전 번역에 진력하여 불법홍통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번역한 경전은『광찬반야경』『정법화경』『유마힐경』『미륵하생경』등 대략 150부 300권이라 한다. 양나라 승우스님은 불교가 중국에 널리 퍼진 이유로 축법호의 공덕을 들고 있을 정도로 역경사에 있어서 그의 공적은 구마라집 이전에 제일로 꼽혔다. 그의 명성을 듣고 모여든 승도가 항상 수천 명이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의 덕을 존경하여 돈황보살, 원지보살 또는 천축보살 등으로 찬양하였다고 한다.
후진 불교의 대표자는 구마라집이다. 구마라집이야말로 이 시대뿐만이 아니라 중국불교사에서 길이 잊을 수 없는 사람으로, 그의 도래는 실로 중국불교사에서 길이 잊을 수 없는 사람으로, 그의 도래는 실로 중국불교로서는 하나의 신기원을 이루는 것이었다. 당의 현장과 함께 역경사에서 2대 역성으로 불리는데, 역장의 완비와 역어의 유창함을 그의 전후를 기준하여 구분할 만큼 불교교학은 구마라집에 의해서 급속도의 발전을 이루었다.
구마라집은 구자국 사람으로 7세 때에 출가하여 모친과 함께 서역제국을 편력하며 불교를 연구하였다. 20세에 이르러 구족계를 받았으며, 그때 그의 명성은 이미 중국에까지 알려져 전진의 부견왕은 그를 초빙하고자 여광에게 구자국을 쳐서 구마라집을 모셔올 석을 명령하기에 이르렀다. 여광이 구자국을 쳐서 그와 함께 돌아오는 도중 전진이 망하고 후진이 일어났다. 이에 여광은 그대로 머물러 후량국을 세웠다. 이리하여 구마라집은 여기에서 약 15년간 머물렀으며, 후진왕 요흥의 초청으로 비로소 장안에 들어오게 되었다. 이것은 후진 홍시 3년(401)의 일이다. 요홍은 그를 보자 크게 기뻐하고 국사의 예로써 대하고 서명각, 소요원을 내려주어 그의 역장으로 삼게 하였다. 이후 그는 장안에서 번역에 종사하기 12년만인 홍시 15년(413)에 70세로 입적하였다.
역경사에 있어서의 위대한 구마라집의 공적은 다시 더 말할 필요도 없으나, 역장의 완비는 역경이 종래의 개인적인 것에서 탈피하여 국가사업으로 기도되었다는 데 큰 의의를 갖는다. 그의 역경은 번역어가 적절하고 유창하며 정확했다. 때문에 그를 통해 고역 또는 구역을 구분하는 기준이 되었다. 그가 번역한 경전은 도합 74부 384권에 이르며, 후세의 교학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중 중요한 것으로는『대품반야경』『소품반야경』『금강반야경』『인왕반야경』『묘법연화경』『유마경』『아미타경』『수능엄경』『유교경』『법망경』『죄선삼매경』『대지도론』『중론』『백론』『십이문론』『십주비바사론』『성실론』등이 있다. 대승 논서는 이때 처음으로 전래되었는데 이로 인해 삼론종, 성실종 등이 등장하게 된다. 또한『반야경』의 역출은 불교교학에 한층 빛을 더해 준 것이며,『법화경』『아미타경』『유마경』등은 후세에 천태종, 정토종, 선종등의 발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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