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9 - 붓다동산74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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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강좌
사찰 벽화 속 민화
가윤회민열화박수물교관수장
불교가 조각, 공예, 회화 등 한국 문화예술 전 승려들은 이러한 신분적 천시를 받으면서 제반
반에 걸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주지의 잡역에 동원되어 온갖 수탈을 감당해야만 했다.
사실이다. 억불숭유정책으로 인해 불교가 쇠퇴 잡역 중에서 가장 피해가 컸던 것은 지역(紙役)
했던 약 300여년의 시기를 제외하고 영·정조 이었다. 사찰의 지물공납은 조선 초부터 있어왔
시대 불교가 재부흥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불교 다. 대동법이 실시된 이후에는 종이 대신 쌀로
미술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상납해야 했기 때문에, 민간의 닥나무 생산이 격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은 전국을 초토화시킬 정 감하게 되고, 민간에서 생산되는 지물의 품귀 현
도로 그 폐해가 극심하여 조선사회는 큰 혼란에 상을 초래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나라에서 쓸
빠지게 된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불교계는 호 종이의 공급원으로서 사찰의 비중이 더 커지게
국승군을 조직하여 왜적을 격파하는데 혁혁한 되었다. 심지어 지방 관리나 유력자들에 의한 사
공을 세워 호국불교로써 사회에 인정을 받으면 사로운 징발과 수탈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서 조선 전기의 강경한 억불숭유정책을 완화시 사회적 변화와 오랜 기간 유교의 탄압을 견뎌
키게 한다. 온 불교는 점차 유교나 도교의 영향을 받아들여
임란 이후 승려들의 사회적 지위가 다소 나아 자연스럽게 현실사회문화를 수용하게 되었다.
졌다고는 하지만 유교에 심취되어 있던 관료와 깨달음과 무소유를 근본바탕으로 정진·수행해
유생들의 부당한 대우는 계속되었다. 승려들을 야 할 일부 승려들에게도 벼슬의 명칭이 부여되
남한산성과 북한산성을 비롯한 성 쌓는 일에 동 었고, 유교 문인풍의 승려문집들이 간행되기도
원시켰을 뿐만 아니라 성을 수비하는 일까지 승 하였다.
려들에게 맡겼다. 뿌리 깊은 불교는 조선후기 기복신앙, 길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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